어른용 주토피아
늑대같은 남자와 토끼같은 여자의 연애스토리가 주는 짜릿함과 스릴은 많은 로맨스물의 인기많은 소재중 하나다. 어린이용 디즈니 애니메이션 <주토피아>만 봐도 두 주인공이 토끼와 늑대다(물론 연애물은 아니지만).
포식자 늑대와 가녀린 초식동물 토끼의 조합은 재미가 없을래야 없을 수가 없다. 심지어 늑대는 기본적으로 동물 자체가 매우 잘생겼다. 날카로운 이빨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지만 늑대라는 동물 자체가 가진 특성과 아름다움은 '저런 동물한테는 한번쯤 먹혀봐도 좋지 않을까', 내지는 '저 위험한 야생동물을 내가 길들일수 있다면' 이라는 판타지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한때 많은 드라마나 매체에서 짐승남에 열광했던 것처럼, 시대가 바뀌어도 위험하고 고독한 수컷에 대한 선호는 로맨스에 있어서는 정석과 클래식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 애니메이션은 19금이다. 그것도 아주 대놓고. 그러나 순수한 사랑보다는 비열하고 슬프고 생존게임에 가까운 어른의 사정 가득한 이야기다. 토끼와 늑대는 진지한 연애관계가 가능할까. 쓸데없이 진지하게 비현실적 설정을 현실적으로 고민하는 이야기.
동물의 세계? 인간의 세계? 그 어느 쪽 일 수도 없는 비스타즈 세계관
비스타즈의 세계관은 지능높은 동물들의 사회다. 다양한 동물들-포유류부터 조류 파충류까지. 의인화 가능한 척추동물은 다 나오지만 모두가 사람처럼 직립보행을 하고 언어생활을 하며 사람과 똑같은 사회를 구성하여 살아간다.
다만 동물들은 크기와 식성에 따라 구분이 되는데 주로 초식동물과 육식동물로 계층이 나뉘어 있으며 기본적으로 초식동물의 기준에 맞추어 디자인되어있는 사회라 할 수 있다.
모든 동물의 '공존'과 '평화'를 위해 육식동물은 본능을 억제하고 초식동물처럼 베지터리안으로 살고 있다. 그러나 완전히 통제되는 것은 아니어서 간혹 범죄-'식살' 이라 일컫는 동물을 잡아먹는 행위가 일어나기도 하고 암암리에(혹은 공공연하게) 육고기가 암시장에서 거래되기도 한다. 육식동물들은 초식동물의 혈액을 구해 마치 마약처럼 즐기기도하며 빈곤에 처해진 초식동물들이 자신의 신체 일부를 육식동물에게 팔며 돈을 벌기도 한다.
한마디로 이 세계관은 철저하게 포식자와 피식자간의 역학관계로 이루어진 인간의 세상을 이야기 하고 있다. 개별성, 각자의 생리, 특수성보다는 이 동물이 육식인가 초식인가로 일괄로 구분되어지며 피식자는 무조건적인 피해자, 24시간 불안에 떨며 살 수 없는 구조적 약자로 규정되고 포식자는 날때부터 힘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자체가 폭력일 수 밖에 없는 사회적 강자로 그려진다.
그러니까 동물의 이야기지만 동물의 특성이나 자연의 특성은 전혀 없다. 일반적으로 자연의 약육강식에 대한 편견에 가까운 선입관을 그대로 가져가며 '인간사회'를 그려내고 있다. 겉모습만 다양할 뿐, 사실은 강자와 약자 이분법에 의해 나눠지는 세계관. 그래서 이 애니메이션은 아주 찜찜하며 암울하고 행복같은 것은 조금도 없다.
그 누구도 행복한 캐릭터가 없다.
이야기는 명문학교 체리톤학원 에서 시작된다. 어느 날, 초식동물 학생이 '식살' 당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 사건으로 학교는 뒤숭숭해지고 초식동물과 육식동물간의 불신이 학교를 잠식한다. 육식동물에 대한 통제는 강화되고 초식동물은 육식동물들을 대놓고 따돌리거나 경계한다. 초식동물은 초식동물대로 피식자로서 본능적인 불안감에 시달리고 육식동물은 이런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의심과 거짓소문으로 고통받는다.
주인공 레거시는 체구가 커다란 회색늑대다. 연극부에서 미술담당인 그는 기본적으로 소심하고 무기력하다. 자신이 육식동물인 것에 컴플렉스가 있으며 얼마든지 주변의 친구들이나 작은 동료들을 무심코 해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자기비하가 심하다. 토끼 하루를 만나며 처음으로 자신의 육식본능에 눈을 뜨게 되는 데, 거의 동시에 그녀에게 사랑을 느끼게 되며 혼란에 빠진다. 그는 애니메이션이 진행되는 내내 자신이 작고 여린 토끼와 사귈 수 있을 지, 왜 자신은 쓸데없이 육식동물인지, 육식본능을 마치 질병취급하는 이 세계관 내에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비하하며 우울에 빠진다. 더군다나 자신의 본능에 심어진 폭력성으로 하루를 위험에서 구해냄에도 이 기조는 거의 끝까지 유지된다. 그는 한번도 자신을 자랑스러워하거나 사랑한 적이 없다.
또다른 주인공 하루는 학교 내의 최 약체 토끼다. 이 학교에는 토끼도 몇 종류가 있는데 아주 평범하고 희소성 조차 없는 흰토끼이다. 초식동물인 것은 둘째치고 같은 종 내에서도 따돌림 받고 있으며 특히 매우 비틀린 연애관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남자들의 성적요구를 절대 거절하지 않는다. 때로는 스스로 침대에 끌어들일 때도 있다. 사랑은 아니다. 딱히 성욕이 남들보다 특출난 것도 아니다. 이유라는 것이 상대방과 성관계를 할 때만 약자취급이 아닌 서로 동등한 인격체로 느껴져서 그랬단다. 그래서 연애관계가 파탄나서 화가난 상대남의 여친들이 원한을 품고 있으며 왕따의 원인이기도 하다. 아주 귀여운 외모와 달리 선택에 고민이 없고 막사는 듯 보이는 절망 속의 인생. 그녀는 희망을 가져본 일이 없으며 늘 죽을 것 같은 불안함을 참고 살고 있다. 하루는 피해자의 삶에 익숙하다.
체리톤 학원의 슈퍼스타 루이는 연극부 주연배우이자 권력자다. 숫사슴으로 엘리트. 집안은 정계의 유력자인듯 하다. 도살장에서 번호표를 찍힌채 도축될 날만 기다리고 있던 처지였지만 특유의 정의감으로 높은 사람의 눈에 들어 그의 집안에 양자로 입적된다. 후계자가 될 의무가 있는 삶. 철저하게 모든것을 숨기며 완벽함을 연기한다. 다리가 부러져도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마음이 흔들려도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하루에게 애정이 있으면서도 아무관계 아닌것처럼. 약한 초식동물이지만 생태계 최강자인 것처럼. 진짜 표리부동한 정치인들 같은 이중적인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매일같이 초식동물로서의 불안감에 떨고 있으며 자신의 약한 육체를 저주하고 혐오한다. 육식동물을 증오하지만 겉으로는 평화를 지향하는 척, 모두의 정의로운 조정자인 척 하는 위선과 허세의 캐릭터. 정혼자가 있으면서 하루와 육체관계를 맺고 그녀에게 마음주지 않을거라 대놓고 얘기하는 쓰레기. 그러면서도 정작, 하루에게 생명의 위험이 닥칠 때는 자신의 지위때문에 지켜주지도 못하는 나약함과 비겁함에 스스로 무너져 버린다.
이 외에도 본인이 육식동물임이 자랑스럽기에 불법적으로라도 육식을 포기하지 못하는 호랑이(이름 까먹음), 식당에 자기가 낳은 계란을 공급해주는 자부심으로 살아가는 암탉, 하루에게 남친을 빼앗기고 하루를 주도적으로 왕따시키는 일진토끼, 채식도 육식도 할 수 있지만 본인의 의지로 대나무만 먹고 사는 암시장의 심신 내과의사인 무술고수 자이언트 판다. 레거시를 좋아하며 출세욕과 야심 넘치는 암컷늑대 등, 등장하는 많은 캐릭터들은 각자의 처지에 맞는 서로 다른 딜레마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 딜레마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대부분의 캐릭터들이 자신의 본성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채 살아간다는 것이다. 자의적으로든 타의적으로든. 그리고 그들이 이렇게 살아가게 되어버린 이유는 웃기게도 '공존, 공영'을 모두에게 천편일률적으로 강요하는 이 애니메이션의 세계관이다.
모든 생물이 같은 가치를 위해 살아가는 이상한 동물의 세계.
이 애니메이션의 세계관은 다양성의 표현이라는게 고작 겉모습의 차이 뿐인것 같다. 토끼와 늑대는 완전히 다른 생태를 가지고 있음에도 마치 똑같은 사람인데 몸집 크기와 식성만 다를 뿐이다. 힘의 크기가 개인을 나타내는 전부인 것 같은 세계관. 동물의 모습으로 표현함에도 진짜 동물의 특성은 폭력성 이외에는 표현되는 것이 없으며 그렇다고 인간의 특성으로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동물적인 설정이다.
하루는 초식동물이자 체구가 작고 암컷이다. 이것이 그녀의 성격을 이루는 캐릭터 소스의 전부다. 그녀의 성격형성은 이 세가지에서 모두 기인한다. 진짜 토끼처럼 형제가 수십마리씩 되거나 수명이 짧다거나 새끼를 낳고 기르는 모성이 강하다거나 스스로 굴을 파며 자기집을 만든다거나 추운 계절을 나는 방법 등, 진짜 토끼라면 상상할 수 있는 그런 모습은 없다. 그녀의 비틀린 연애관이나 삶은 '모든 면에서 철저하게 약자'인 정체성에서 나온다. 다른 토끼 캐릭터도 있지만 품종이 조금 더 좋다거나 남자거나 하는 등, 하루와 비슷한 계층적 설정은 하루가 유일하다. 그리고 다른 캐릭터들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선역에 속하는 모든 캐릭터들은 초식동물과 육식동물이 그런대로 잘 지내는 평화로운 세상을 원한다. 그러기 위해 작품은 초식동물의 손에 무기를 쥐어주고 육식동물에게는 영원토록 본능을 억제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다. 그러나 자연속의 개체들은 절대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는다. 각자의 삶과 욕구에 충실하기에 다양성은 생겨난다. 자신의 삶을 제대로 마주하지 않은 채 약자로서의 정체성에만 매몰된 토끼 하루, 개인의 특성과 캐릭터보다는 늑대로서 포식자로서의 캐릭터가 전부라고 스스로 인식하는 회색늑대 레거시.
결국 이 애니메이션의 모든 캐릭터는 계층 컴플렉스에 심각하게 빠져 있다. 개인의 꿈과 생활은 없고 고개를 푹 숙여 자신의 날카로운 손톱만 바라보며 자학하는 주인공을 볼 때마다 나는 홧병이 날 것 같았다. 캐릭터는 없고 계층의 대변자만 존재하는 작품. 그래서 볼 수록 미간이 찌푸려지고 기분이 우울해지며 찜찜하고 불편감을 유발한다. 넷플릭스가 넷플릭스 한 작품이랄까.
동물의 삶, 자연이 힐링을 주는 이유-생존의 다양성
나는 포식과 피식의 선악구도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자연다큐멘터리를 볼때 귀여운 동물들의 모습에서 힐링을 하기도 하지만 사실 놀라울 만큼 기상천외하고 다양한 생존방식이 힐링의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내가 이상한 사람이 아닐까.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라며 머리가 복잡할때, 자연은 나 따위는 비교도 안될 만큼 과격하면서 놀라운 방식으로 생존하고 유전자를 퍼트리며 살아간다. 거기에는 선도 악도 없다. 생존을 위해 본능은 유전자에 각인되어 있으며 새롭게 환경이 변화한다면 그에 맞추어 바뀐 생존방식이 또 유전자에 새겨진다. 육식동물이 없는 세상은 초식동물의 천국이 아니라 폭증하는 초식동물의 먹이활동으로 인한 초원의 황폐화, 식물의 멸종이며 다시 피해는 먹이가 없어져 굶주리게 될 초식동물에게 돌아온다. 포식자의 삶도 생각보다 사냥 성공률이 높지않아 굶어 죽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육식동물도 초식동물도 아무런 이유없이 랜덤하게 그렇게 생겨난 것이 아니라 각자의 생존환경에 따라 그렇게 살아남게 된 것이다. 존재에는 선악을 부여하면 안된다. 힘에 대한 책임의 의미가 힘에 대한 형벌인 것처럼 묘사되는 찜찜함. 그래서 나는 공존을 이야기 하는 이 작품에서 도리어 편협함을 느꼈다.
차라리 동물이 아니었다면
철저하게 인간 캐릭터였다면 어땠을까. 찜찜하지는 않겠지만 재미도 없었을 것이다. 동물 캐릭터가 아니라면 이야기 구조도 심플하고 평범한 편에 속할 거다. 사실 이 작품의 매력은 캐릭터가 동물이기에 외형의 호감도, 집중도가 아주 좋다는 것이다. 인간캐릭터였다면 호불호가 있었을 것을 동물이기에 거부감이 없다. 인간의 모습이었다면 발암캐, 혹은 극혐캐 같은 별칭이 붙었을 캐릭터가 대다수다. 그나마 얼굴이 귀엽고 재밌는 동물 모습이기에 흥미롭게 지켜볼 수 있었다. 위험한 늑대와 가녀린 토끼의 애정씬을 보고 두근두근 하지 않을 사람이 어딨을까. 표현도 리얼하고 퀄리티도 굉장히 좋다. 로맨스를 기대하고 봤지만 사실 사회물에 가깝기 때문에 기대는 깨졌지만 그래도 끝까지 보게되는 흡인력이 있다.
그럼에도 선악을 동물로 빗대어 표현하는 것에는 거부감이 든다. 인간에게도 포식자와 피식자가 있다고 보여주는 것일까. 소형동물은 선하고 대형동물은 악한가? 당근과 채소를 먹으면 선하고 고기를 먹으면 악한가? 그래서 피식자들이 서로 힘을 함쳐 포식자에 저항해야 한다고? 진짜로 동물처럼 자신이 포식자인지 피식자인지 외형으로 드러난다면 골치아플 일이 많이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인간사회에서 그 둘은 구분할 수 없다. 누가봐도 늑대인 인간, 누가봐도 토끼인 인간이 있나? 같은 사람이어도 누군가에겐 토끼가 되고 누군가에겐 늑대가 된다. 포식자임에도 철저하게 피식자를 가장하는 사람도 흔하다. 폭력으로 선악을 구분하려 하지만 또 누군가는 그점을 철저하게 이용하며 속이기도 한다. 인간은 서로를 구분할 수 없다. 잡아먹히고 나서야 뒤늦게 깨달을 뿐이다.
성욕=식욕=폭력인 세계관
회색늑대 레거시는 토끼 하루에게 침을 흘리며 식욕을 느낀다. 또한 자신을 난생 처음 수컷으로 대하는 하루를 이성으로 의식하게 되며 성욕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모두 하루의 관점에서는 폭력이다. 식욕은 곧 자신의 죽음으로 직결되며 성욕은 지나친 체격차이로 인해 결국 폭력이 될 것이다.
레거시는 하루에게 호감이 있지만 포식자로서 먹이로 느껴지기도 한다. 하루도 레거시에게 호감이 있지만 자신이 그에게 먹히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그의 입속에 자신의 팔을 자연스레 쑤셔넣는다.(이 부분은 사실 잘 이해가 안감. 피식자로서의 본능이 먹히는 본능이라는건 좀...도망가는 본능이라면 모를까...) 둘의 이성적인 호감은 본능적인 관습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상황이다.
성욕과 식욕은 생명으로서 자연스러운 욕구이다. 그와 동시에 생존과 직결되는 욕구이기도 하다. 그런데 함께 살아가는 친구가 그런 기본욕구를 폭력으로 느낀다? 존재자체를 폭력으로 느끼는 관계가 친구일 수 있을까? 같이 살아가는게 가능하기나 할까? 그럼에도 이 작품은 존재자체가 한쪽에게 일방적인 폭력인 관계를 같이 공존하는 관계로 설정했다. 인간세상을 빗대어 표현했다치면 이 작품은 인간사회를 그정도로 끔찍한 사회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서로 먹고 먹히는 관계일 뿐인데도 마치 동료인척 친구인척 아무렇지 않게 살고 있으며 때로는 서로에게 애정을 느끼기 까지하는 모순적인 세상이라고.
또한 비스타즈 세계관에서 이종간의 연애는 일종의 성소수자처럼 흔치 않은 일인 것으로 표현된다. 이종간 커플은 입장도 안되는 러브호텔이 있을 정도다. 당연히 자식을 낳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들의 모든 동료들이 둘의 연애를 보며 못믿겠다는 반응을 하고 응원을 하지 않는다. 회색늑대의 절친 리트리버는 토끼랑 사귀어도 변태취급하지 않겠다고 맹세할 정도다. 둘의 사랑은 진정한 애정일까 잘못된 폭력일까. 늑대는 토끼에게 꽂혔고 토끼는 늑대에게 목숨을 빚졌다. 둘의 사랑은 지나친 고민과 너무 많은 망설임과 옳고 그름에 대한 저울질로 점철되어있다.
사랑은 교통사고여야 하는데
그래서 둘의 러브라인은 그다지 두근두근하지 않다. 머릿속을 비워내는 산뜻한 감정이 없다. 서로에게 다가가는데 뭔 수만가지의 이유가 필요하고 각자의 생존본능을 억눌러야 한단다. 레거시는 그런 사랑을 해서 행복한가? 하루는 그런 사랑을 받아 행복할까? 장르가 어찌되었든 이야기의 주축이 둘의 연애인데 뒤로 갈수록 그다지 설레지도 않고 별로 응원할 맘도 안든다. 작품의 완성도를위해 억지로 연애시키는 느낌이다. 둘은 서로 가까이 갈수록 행복과 편안함보다는 서로를 향한 불안과 자신을 향한 불신으로 괴로워한다. 그냥 싸게싸게 헤어지고 딴사람 찾았으면 좋겠다. 둘 다. 굳이 왜? 라는 의문이 떠오르는 러브스토리는 매력적이지 않은 것 같다.
총평
탄탄한 원작덕분인지 완성도가 높다. 이런 스토리를 굉장히 좋아할 사람도 많을 것이다. 완성도, 작품성 높은 '작품'을 원한다면 강추한다. 원작은 굉장히 인기가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캐릭터디자인도 굉장히 잘 되어있고 아이디어도 좋다. 나처럼 머릿속 잡생각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면 즐겁고 재미지게 볼 수 있을 것이다. 두 명의 주인공 보다 개인적으로는 사슴 루이 캐릭터가 굉장히 매력적이다. 현실에 있음직한 입체적인 밸런스가 탄탄한 캐릭터다. 목표도 분명하고 트라우마도 분명하고 내면의 강약표현이 세련되었다. 레거시처럼 일방적 찌질이도 아니고 하루처럼 한숨나오는 캐릭터도 아니다. 쓰레기캐릭터지만 잘생긴 타는 쓰레기다. 이 애니메이션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였다. 누구든, 봐서 재미없다고 느끼지는 않을 것 같다. 찜찜하고 암울해지긴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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